박준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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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준은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후 만주국에서 교장을 역임했으며, 해방 후에는 해외통신사 사장 등을 지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북 군위군에 무소속으로 당선되었고, 국회에서 활동하며 이승만 대통령에게 국무총리 등 요직에 대한 건의서를 전달했다. 대한국민당 소속으로 활동하다 탈당 후 일민구락부에 참여했으며, 1963년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10월 유신을 지지했다. 1973년 종로구 자택에서 69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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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 (정치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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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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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밀양 박씨(密陽 朴氏) |
출생 | 1965년 7월 25일 (58세) |
출생지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
학력 | 마산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법학과 졸업 |
경력 | |
소속 정당 | 국민의힘 |
지역구 | 경상남도 김해시 김해을 |
의원 선수 | 초선 |
주요 경력 | 제28회 사법시험 합격 김앤장 변호사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 박근혜 대통령후보 정책특보 국민의힘 김해시 을 당협위원장 |
의정 활동 | 제22대 대한민국 국회의원 |
2. 약력
경상북도 군위군[1] 또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3] 일본 대학 법학부 정경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정부가 시행한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만주국 간도성에서 동진학교 교장을 지냈다.[1]
경상북도 군위군[1] 또는 서울특별시 종로구[3] 출신이다. 일본 니혼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일본 정부에서 시행한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만주국 간도성에서 동진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해방 후에는 해외통신사 사장, 국제평론사 사장, 서울합동소비조합 이사장 등을 지냈다.[1][3]
해방 후에는 해외통신사 사장, 국제평론사 사장, 서울합동소비조합 이사장을 역임했다.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북 군위군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6월 국회 자격 심사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7월에는 무소속구락부 대표로서 당시 남조선과도정부와 한국민주당 측 인물을 국무총리 등 요직에 기용하는 것에 반대하는 건의서를 대통령 이승만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9월에는 국회 내 남북통일 연구 단체인 이정회가 결성될 때 재무 위원으로 참여했다.[1]
이후 대한국민당에 몸담았으나, 1949년 1월 한국민주당과의 합당에 반대하며 탈당했다. 같은 해 2월에는 농지 개혁에 관한 임시 조치 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4월에는 이정회에서 탈퇴하고 이승만의 일민주의를 지지하는 일민구락부에 가입했다. 6월에는 주한 미국 군사고문단 설치를 환영하는 성명에 이름을 올렸으며, 10월 개정된 국회법에 따라 징계 자격 위원회 소속이 되었다.[1][3]
1949년 12월, 비민주국민당 세력을 통합하여 대한국민당을 개편하려 한다는 이유로 국회 부의장 윤치영과 함께 일민구락부에서 제명되었다. 그러나 1950년 1월 26일, 일민구락부, 신정회, 대한노농당 및 무소속 의원들이 통합하여 대한국민당이 창당되자 여기에 합류했다. 2월에는 대한국민당 선거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4월에는 후임 국무총리로 윤치영을 추천했다. 같은 달 대한정치공작대 사건 조사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이 사건과 신탁은행 부정 대출 사건을 국회 본회의에서 보고하는 과정에서 난투극이 벌어지기도 했다.[1]
박준은 제헌 국회의원 임기 동안 결석 없이 의정활동에 참여한 3명의 의원 중 한 명이었다. 1950년에는 서울사범대학 후원회 회장, 한미협회 이사, 대한학도보도협회 회장 등을 맡기도 했다.[1]
1963년에는 민주공화당에 입당했으며, 1972년에는 제헌 동지회가 발표한 10월 유신 지지 성명에도 이름을 올렸다.[1] 1973년, 지병으로 서울 종로구 자택에서 69세로 별세했다.[4]
3. 생애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북도 군위군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제헌 국회 임기 동안 무소속구락부, 이정회, 대한국민당, 일민구락부 등 여러 정치 그룹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농지 개혁에 관한 임시 조치 법안에 찬성했으며,[1][3] 주한 미국 군사고문단 설치를 환영하는 성명에 참여하기도 했다.[1][3] 제헌 국회 임기 중 개근한 3명의 의원 중 한 명이었으며,[1] 서울사범대학 후원회 회장, 한미협회 이사, 대한학도보도협회 회장 등 사회 활동도 겸했다.[1]
1963년 민주공화당에 입당했으며, 1972년 제헌 동지회의 10월 유신 지지 성명에 참여했다.[1] 1973년 지병으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자택에서 사망했다.[4]
3. 1. 초기 생애 및 교육
일본 니혼 대학 법학부 법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이후 일본 정부에서 시행한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만주국 간도 지역에서 성동진학교를 경영하기도 했다. 귀국 후에는 해외통신사와 국제평론사 사장을 역임하였고, 서울합동소비조합 이사장을 지냈다.
3. 2. 해방 후 정치 활동
해방 후에는 해외통신사 사장, 국제평론사 사장, 서울합동소비조합 이사장을 역임했다. 1948년 5월 10일 치러진 제1대 총선에서 경상북도 군위군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제헌 국회 개원 후, 1948년 6월부터 자격 심사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7월에는 무소속구락부 대표로서 당시 국무총리 등 주요 공직에 현 과도 정부 인사와 한국민주당 측 인물을 기용하는 것에 반대하는 건의서를 대통령 이승만에게 전달하기도 했다.[1][3] 그해 9월, 국회 내에서 남북통일을 목표로 결성된 연구회가 이정회로 이름을 바꾸었을 때 재무부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이후 대한국민당에 참여했으나, 1949년 1월 한국민주당과의 합당 논의에 반대하며 탈당했다. 같은 해 2월에는 농지 개혁에 관한 임시 조치 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1][3]
1949년 4월, 이정회에서 탈퇴하고 이승만의 일민주의를 지지하며 설립된 일민구락부에 가입했다. 같은 해 6월에는 주한 미국 군사고문단 설치를 환영하는 성명서에 서명했으며, 10월에는 개정된 국회법에 따라 상임위원회가 개편되면서 징계 자격 위원회 소속이 되었다.[1][3]
그러나 1949년 12월, 비민주국민당 세력을 통합하여 대한국민당을 재편하려는 움직임과 관련하여 국회 부의장 윤치영과 함께 일민구락부에서 제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0년 1월 26일, 일민구락부, 신정회, 대한노농당 및 무소속 의원들이 통합하여 대한국민당이 창당되자 여기에 합류했다. 1950년 2월에는 대한국민당의 선거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같은 해 4월에는 후임 국무총리로 윤치영을 추천했다. 또한 4월에는 대한정치공작대 사건 조사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이 사건과 신탁은행 부정 대출 사건을 국회 본회의에서 보고하는 과정에서 난투극이 벌어지기도 했다.[1]
박준은 제헌 국회의원 임기 중 단 3명뿐인 개근 의원 중 한 명이었다. 1950년에는 서울사범대학 후원회 회장, 한미협회 이사, 대한학도보도협회 회장 등 다양한 사회 활동도 겸했다.[1]
이후 1963년 민주공화당에 입당했으며, 1972년에는 제헌 동지회가 발표한 10월 유신 지지 성명에도 이름을 올렸다.[1] 1973년, 지병으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자택에서 향년 69세로 사망했다.[4]
3. 3. 말년
1963년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였다.[1] 이후 1972년에는 제헌 동지회의 일원으로 10월 유신 지지 성명에 참여하기도 했다.[1] 1973년, 지병으로 종로구 자택에서 향년 69세로 세상을 떠났다.[4]
4. 평가
(작성할 내용 없음)
5. 역대 선거 결과
wikitext
참조
[1]
웹사이트
박준(朴峻)
https://encykorea.ak[...]
2023-08-17
[2]
웹사이트
자료일람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s://db.history.g[...]
韓国史データベース
2023-09-28
[3]
웹사이트
대한민국헌정회
https://rokps.or.kr/[...]
2023-08-17
[4]
웹사이트
제헌의원 박준씨 별세
https://www.joongang[...]
1973-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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